2006년에 이어 2012년 두 번째로 들어선 일본의 아베 정권은 금세 아시아의 골칫거리가 되어버렸다.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과거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고 여론을 호도하거나 뻔히 공개되어 있는 객관적인 사료와 증거들을 무시하고 일본군 성노예(일명 정신대’)와 일본 정부는 무관하다는 망언도 서슴지 않는 등 오른쪽으로 치우칠 대로 치우쳐버린 아베 정권은 정말 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이자 세계의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경화된 일본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전에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 역사를 얼마나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서울 겨레하나 마포지부의 역사 기행은 바로 그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퍼부으며 무슨 망언이 하나 나올 때마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일본을 성토한다. 그러나 교학사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교학사 교과서가 문제라는 것은 대충 알고 있지만, ‘교학사 교과서의 어떤 사관과 접근법이 문제이며 어떤 사실들이 왜곡되어 기술됐는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가? 심지어 많은 시민들이 교학사 교과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체를 모르기도 한다. 마포 겨레하나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고, 올바른 역사 의식을 갖는데 효과적인 현장 교육으로서의 역사 기행을 기획하게 되었다.

우선 첫 번째 기행은 거리적 부담감 없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동네의 역사적 장소를 찾기로 했다. 그래서 결정된 곳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다. 그리고 그 기행을 안내해주실 분으로 서승 교수님을 초빙할 수 있었던 것은 마포 겨레하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현재 일본 릿츠메이칸 대학교 법학부 교수이신 서승 교수님은 1971년 재일동포 형제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으로 19년간 옥고를 치루신 분으로써 수형 기간 중 일부를 서대문 형무소에서 직접 복역하셨던 적도 있었기에 역사 기행 참가자들은 체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었다.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있지만, 1907년 일제가 이곳에 최초의 서양식 감옥을 건축한 이래로 이곳은 1987년까지 감옥으로 실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서대문 형무소는 1945년 해방 전까지는 농민 혁명가, 의병, 계몽 운동가, 독립운동가 들을 수감하여 고문하고 사형시키는 곳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해방 이후에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많은 시국사범들이 가두고 억압하는 곳으로 그 악명을 유지했다. 또한 대표적 사법 살인이라 일컬어지는 인혁당 사건의 도예종 외 8명을 비롯,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과 민족일보 조용수 등이 부정의한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장소도 바로 이 서대문 형무소다. (1950년대에는 수감자의 70퍼센트가 좌익인사였다고 한다.) 이처럼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민주화 운동 기간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고스란히 지켜본 목격자라 할 수 있다. 서승 교수님께서는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는 장소로서만 서대문형무소를 파악한다면 서대문 형무소의 극히 일부 밖에 못 보는 것이라 하셨다. 서대문 형무소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갖는 역사적 위상에 대해 재고할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실 것이다. 나 또한 서대문 형무소에 대해 독립운동가 분들이 고초를 당한 곳으로만 생각했었지 해방 후 민주인사들이 고통 받고 죽임을 당한 곳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으니 그 말씀은 나에게도 정확히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11~12옥사)는 민주 인사들에 대한 설명도 많이 보강되어 있었다. 서승 교수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인혁당 사건 같이 해방 후의 중요 사건에 대한 설명이 보강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그 외 사건들의 설명은 너무 인물 중심적으로 되어 있어, 나중에는 사건 중심으로 더 보강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인물 중심으로 설명이 되다 보면 역사적 의의 보다는 인물 미화에 설명이 치우칠 수 있어 사건의 본질적 의미를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셨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크게 보안과 청사 건물(현재 상설 전시관), 옥사, 공작사(노역 시설), 한센 병사, 여옥사(여성수감자 시설), 사형장(별도 사적으로 지정)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번 기행에서 중점적으로 봤던 곳은 보안과 청사와 옥사, 사형장이었다. 서대문 형무소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남아있는 파놉티콘(표준어 표기법이 통일되어있지 않아 판옵티콘, 패놉티콘, 팬옵티콘으로도 표기된다;Panopticon) 양식으로 지어진 감옥이다. 이 양식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감옥(또는 정신 병동 등 감시 목적용) 건축 양식으로 벤담은 이 양식을 도입하면 소수의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많은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양식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미셸 푸코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이 건축 양식이 언급되면서 부터다. 푸코는 이 책에서 과거 사회가 다수의 군중이 한명의 권력자를 우러러 보는 스펙터클의 사회였다면, 현재는 한명의 권력자가 다수의 군중을 감시하는 규율 사회로 변화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권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전개하게 된다. 서승 교수님도 푸코를 언급하시며 파놉티콘 양식은 수인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감시자를 감시하는 곳이라는 얘기를 하셨다. 결국 감시자를 감시함으로써 더욱 능률적으로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장소가 파놉티콘이라는 설명이었다. 자신이 수감 생활을 할 때 말단 간수들이 중간 간부들에게 혼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고 하셨다. 또한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면 되는 것이지 실제로 감시를 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다고도 얘기하셨다. 나는 이 말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삶이 얼마나 비참할지에 대해 생각해보니 말이다. 안 그래도 민간인 사찰이 횡행하고 하는 현 한국 사회에서 이 지적은 얼마나 날카로운 지적인지 새삼 놀라왔다.

현재 상설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보안과 청사 건물에는 일제 강점기 중심의 전시가 되어 있었다. 의병, 독립 운동가를 위주로 전시가 돼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중이 어떻게 저항하고 억압받았었는지 엿볼 수 있는 자료와 전시물들이 채워져 있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표들로 이루어진 방에 들어섰을 때,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표식인지 몰랐으나 이내 그것이 독립운동가 분들의 수형표임을 알아차렸을 때는 사뭇 비장감에 숙연해졌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내가 이 나라 이 땅에서 독립 주권 국가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순국선열들의 희생에 보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자연스레 다짐을 하게 됐다. 상설전시관에는 그 외에도 3.1독립만세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도공산당 등 사회주의 운동, 조선어학회, 성서조선 등에 관한 전시도 하고 있어서 일제 강점기 당시 각계각층에서 벌어지고 있던 독립운동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라고도 할 수 있는 지하 고문실도 상설 전시관에 있다. 사실 나는 (독립기념관에서도 그렇고) 이 고문 재현 장면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괴로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고개를 돌리고 안 봤으면 좋았겠지만 역사 교육이라는 목적을 위해 보기는 했어도 역시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고문은 정말 이 세상에서 없어져 마땅한 범죄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셨던 독립 운동가들이 저토록 잔학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순국하시거나 불구가 되기도 하셨다니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이를 부정하는 아베 정권은 도대체 어떻게 된 정권일까? 일본의 우경화를 저지시키는 것을 물론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는 것이야 말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초를 당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유훈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 끔찍한 역사를 잊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끔찍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상설전시관을 지나 옥사에 이르렀다. 앞에 서술한대로 옥사는 중심부에서 감옥 전체를 아우르며관망할 수 있는 전형적인 파놉티콘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2층은 보안이 강화된 시설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곳에는 보통 유명한 시국 사건 관련 수인들이나 강력 범죄를 일으킨 사람들이 수감되었다고 한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수감된 분들도 그 곳에 수감되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은 2층에서 뛰어내리는 탈옥시도를 하셨지만 다리를 다치시고 얼마 후 다시 붙잡히셔서 결국은 사형을 당하셨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목욕시설이 따로 있었는데 박정희 시절에는 목욕을 할 수 있는 횟수가 일제 시대 때보다도 못했다고 한다. 아무리 인권이 없었된 시절이라고 하지만 일제 시대 때보다도 못하다니 정말 박정희 정권 시절이 인권의 암흑기’였다는 말은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감옥은 다인실과 징벌방(먹방)이라 불리는 독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 평도 안 되는 독방의 비인간적 처우는 말할 것도 없고, 다인실이라 불리우는 곳도 일제강점기 때는 마구잡이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수감자가 많을 때는 6인이 정원인 곳에 20명을 수용하여 동시에 모든 수감자가 잠을 잘 방법이 없어 (눕지 못하는 사람은 서있는 방법을 통해) 번갈아 가면서 잠을 자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 감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 침해라 할 수 있다. 차라리 모든 수감자들이 옆으로 누워서 (일명 칼잠)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의 수용 상태면 그나마 나은 처지였다고 했다.

그리고 한센 병사가 따로 있어서 한센병을 갖고 있는 수인들은 따로 수감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료 환경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서승 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몸이 아파 의사를 찾아 갔는데 의사가 자신을 청진하며 청진기를 목에만 두르고 청진기를 귀에 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죄송한데 청진기를 귀에 꼽지 않으셨다고 얘기하자 그 의사는 내가 의사지, 당신이 의사냐며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이처럼 의사의 자질은 물론 약품도 부족하고, 환자를 위한 병상도 충분하지 않아 원래 병이 있는 수감자나 감옥에서 병이 생긴 수감자의 의료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병사에 수감되면 노역에서 열외가 되기 때문에 일반 수감자들은 병사를 천국이라 불렸다고 한다. 요즘도 돈 많은 사람이 종종 감옥에 수감되며 휠체어를 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당시에도 부정을 통해 병사에 수감되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하니 이런 형태의 부정부패는 꽤나 역사가 긴 것 같다. 대신 그 당시에 병사에 수감되는 사람은 일반 수감자들 보다 밥을 조금 주었다고 한다. (밥의 양은 4종류로 분류되었는데, 사상범과 병이 있는 수감자들은 노역을 안 시키고 대신 밥을 조금 줘서 항상 배가 고팠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곳이 사형장이었다. 1923년에 지어진 허름한 목조 건물, 일제 시대 때 사형 선고를 받은 독립운동가들은 수감 생활을 어디서 하셨건 모두 이곳으로 이감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한다.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다 조국의 자주적 독립을 못 보고 먼저 그 길을 가실 때 그 눈을 편히 감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무거워졌다. 또한 해방 후에 부당한 권력에 의해 사법 살인을 당하게 된 민주 인사들, 그 분들은 또 얼마나 억울하셨을까. 이 작은 건물에서 그토록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을 감히 상상하기가 어려웠지만, 이 또한 똑바로 바라보아야 할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었다. 주권 국가를 갖지 못하거나 부정의한 권력에 의해 지배받을 때 그 피지배 민중은 사법적 정의를 향유할 수 없다는 진실, 그러한 부정의 아래서는 보편적 가치인 자유, 평등에 기초한 인권은 전혀 보장받을 수 없고 결국 생명마저도 부지할 수 없다는 염연한 역사적 현실 앞에 나는 서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냉철한 역사 인식이 없다면 비극적인 역사는 언제든지 되풀이된다고 서대문 형무소의 한 작은 목조 건물은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20여명의 참가자들은 공터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얘기가 오고 갔으나 한 참가자가 남겼던 한마디 소감을 여기에 적는다. 그 참가자는 잊혀진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말했었다. 공감이 됐다. 내가 사형장 앞에서 느꼈던 감정도 바로 그것이었다. 잘못을 잘못으로 남겨두고 고치지 못한다면, 결국 그 잘못은 다시 반복되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배도 마찬가지다. 그 역사를 잊는다면 오늘날 우리는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막지 못할 것이다. 그 식민지 야욕의 칼날을 다시금 우리에게 겨눠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부정의한 권력에 의한 폭정도 마찬가지다. 독재 반민주 정권의 역사를 잊는다면, 우리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 개입 정치, 권언유착 여론 조작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한다면 이 제2차 박정희 망령 정권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말라는 법도 없다. 우리가 과거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 말이다.